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대 미술(한국) (문단 편집) === 1900년대~1950년대 근대미술 === 20세기 전반에 한국의 역사적 상황은 아주 다사다난 했던 시기였다. 국권을 일제에 빼앗겼고, 일제 군국주의를 거쳐서 해방과 6.25 전쟁을 겪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미술작품을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다. 시기별로 살펴보자면, 1900년대 초는 근대화로 인해 서양의 문물이 조선으로 들어왔던 시기이다. 작가들은 서양화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전통화에 적용을 시도하였다. 이 시기에 유명한 화가는 서양화풍의 동양화로 양반들의 초상화를 그렸던 [[채용신]]이 있다. 이후 [[일본 제국|일제]]하에서는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공모전 '선전(鮮展)'이라고 하는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화가들이 발굴되었으며, 일본 유학의 과정 속에서 모더니즘 미술을 접하고 이를 자신의 작품 속에 적용시키던 시기였다.[* 미국,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 모더니즘 미술은 외국의 것들을 맥락없이 한꺼번에 수입해 오는 모습을 보였다. 즉 순차적으로 사조별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뷔페식으로 한번에 들어왔다는 것. 이에 따라 어떤 작가는 [[인상주의]], 어떤 작가는 [[야수파]] 같은 식으로 자기 입맛에 따라 사조를 선택해 작업했다. 때문에 그 사조의 원래 의미까지 따른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외형상 보이는 양식을 따라하는데 그쳤다.] 이 시기 미술은 대부분 공모전이었기 때문에 작품의 형태가 대형화되었고, 일본 심사위원의 이국적 취향에 부합하는 조선의 [[오리엔탈리즘|향토성]]에 관련한 소재들로 작품들이 이루어진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향토색은 '예술에 반영되는 그 지방의 기후, 색채, 민속, 사상, 감정 등의 특색, 즉 지방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본은 일제강점기 식민지의 낙후된 현실을 '향토'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식민정책에 이용하였다. 일본 국내적으로는 국민들이 사회 현실문제 대신 이국 취향에 관심을 돌리게 함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적으로 해소하고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식민지 국민들에게 그들이 문화적으로 낙후되었다는 사실을 주입시킴으로써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문화적 식민주의를 강화하였다.][* 보통 오리엔탈리즘 사상은 서구 유럽인들이 동양을 바라볼 때의 사고방식이지만, 일본은 스스로를 서구 열강과 동일하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자연스레 그들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바로 이런 오리엔탈리즘, 즉 서양과 동일한 생각을 식민지 조선인에게 투영한 것이 향토성의 강조이다.] 대표적 작가는 [[이인성(화가)|이인성]]. 1940년대 전후로는 미술이 반민족친일 선전활동을 하는데에 이용되었는데, 이때 '선전(조선미술전람회)'을 통해 활동한 작가들이 동원되었다. [[김은호]], [[김기창]]이 대표적이다. [* [[김은호]]는 1940년대 전부터 자진해서 친일미술활동을 했을 정도로 열심이었으나, [[김기창]]은 그래도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이 급해지자 '압박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출품했다'고 변명도 하고 '나중에 한국화단에서 이런 일은 다시 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사죄를 하기도 했으니, 둘을 똑같이 바라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어쨋든 이들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위키백과에 게시된 [[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C%A1%B1%EB%AC%B8%EC%A0%9C%EC%97%B0%EA%B5%AC%EC%86%8C%EC%9D%98_%EC%B9%9C%EC%9D%BC%EC%9D%B8%EB%AA%85%EC%82%AC%EC%A0%84_%EC%88%98%EB%A1%9D%EC%9E%90_%EB%AA%85%EB%8B%A8_-_%EB%AC%B8%ED%99%94/%EC%98%88%EC%88%A0|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 문화/예술]] 항목을 참고.] 1940년~1950년대는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작품들은 매우 귀하다. 북한에서는 [[변월룡]], [[이쾌대]]의 작품처럼 사회주의 리얼리즘적인 작품이 만들어졌으며 남한에서는 서구의 모더니즘적인 미술을 받아들이면서 추상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해방과 전쟁의 시기를 겪으면서 좌우익의 대립 그 안에서의 갈등이 작품의 주제로 표현되었으며, 또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에 대한 갈망과 염원 또 한편으로는 좌절 등을 포함하는 미술 작품들이 탄생했다.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이중섭]], [[이응노]] 같은 작가들이 이 시기의 작가들이다. 해방 이후의 모더니즘이 그 이전의 모더니즘과 차별되는 점은, 모더니즘이라는 기법에 '왜색'에서 벗어난 한국만의 '향토성'이 표현되고 있느냐는 담론이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향토성이라는 주제는 이미 일제강점기 선전(조선미술전람회)체제에서도 심사위원들이 심사 기준으로 삼았던 중요한 주제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향토성이라는 것은 일본인의 시선에서 일제의 근대화와 대비되어 조선의 원시성을 관음하는 우월적 편견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발전되지 않은 조선의 농촌 모습을 그린 작품들이 많은데, [[이인성(화가)|이인성]]의 작품 <가을 어느 날>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향토성[* 해방 이후 '민족성', '민족 미술' 등으로 대체된다.]이라는 단어는 서양의 기법과 한국의 전통 계승이라는 두 개의 이질적인 코드를 융합하는 과정에서, 일본 회화의 영향[* 일본 회화(일본화)의 특징은 호분과 암석을 갈아 아교에 녹여 물감을 바르는 방식으로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색감이 특징이다. 이인성이나, [[김은호]]와 그의 제자 [[김기창]], [[장우성]] 등이 이런 방식의 그림을 그렸다.]에서 벗어난 '한국인만의 특유의 정서'를 모색하는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된다. 오래전부터 한국의 전통적인 미로 주목되었던 [[해학]]성의 반영 ([[이중섭]], [[최영림(화가)|최영림]], [[이만익]]) 또는 민속적인 소재를 통해서 한국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경향 ([[김기창]], [[박수근]], [[장리석]])이 해방 이후에 생겨났으며, 이 때를 기점으로 한국의 모더니즘은 60년대까지 근대화와 한국적 정체성, 이 두 개를 놓고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